인천에서 태어난 원조 음식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작점이다. 1883년 인천 개항 후 유입된 수많은 근대 서구 문물은 인천에서 첫선을 보인 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서구식 호텔과 철도, 등대 등이 모두 인천에서 시작됐다.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 인천에서 만들어지고 인천에서 발전한, 인천이 ‘찐’인 음식을 모았다.
짜장면
1880년대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청나라 군대의 보급을 위해 들어온 쿨리(중국인 노동자)들은 거리가 가까운 산둥성에서 주로 왔는데 이들이 인천항 인근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처음으로 한국의 화교 공동체를 이루었고, 원래 산둥성의 가정식이었던 작장면을 1890년대 인천항의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에게 판 것이 시초이다. 이때는 정식 식당이 아니라 부두 한켠에서 솥단지를 걸어놓고 노점 장사를 하였고, 면도 수타면이 아닌 칼국수였다.
이후 화교 공동체가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정식 청요리집도 생겼고, 서민 음식이었던 짜장면을 정식 청요리집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자 중국 산둥지방의 복사라는 지역에서 본토의 수타 기술자를 불러와서 짜장면은 수타면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1900년대 이전에 이미 인천의 개항장 일대, 차이나타운의 여러 식당에서 짜장면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후에 공화춘의 짜장면이 이름이 알려져서 짜장면의 원조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1세대 화교 출신 요리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화춘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여러 청 요릿집들에서 짜장면을 판매하고 있었고 누가 원조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화교촌에서 자연스럽게 현재는 요리 자체의 원조 여부보다는, 최초로 "짜장면"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에 대한 원조로 인정하는 것이 중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초창기 짜장면은 지금과 같이 면을 짜장에 비벼 먹지 않고, 면 위에 얹힌 짜장을 면에 살살 묻혀 가며 먹었다.
1908년 설립 당시에는 산동회관(山東會館)[2][3]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당시에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중국식 여관인 객잔(客棧)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을 기념해서 '공화국의 봄'이라는 뜻의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꿨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인들이 인천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고 조선과 청 사이의 무역이 성행하자 중국 요리를 파는 요릿집이 생기기 시작는데, 공화춘도 그 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중국인 무역업자들을 주 고객으로 삼았는데, 뒤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공화춘이 짜장면을 제일 처음 팔았던 가게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뒤에는 토착화된 중화요리가 조선인들에게도 인기를 얻으면서 식사 공간이 확장되었고, 결혼식 등 대규모 연회도 소화할 수 있는 연회장까지 갖춰 당시 기준으로는 고급 음식점으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했고, 이후 1953년 우희광의 아들인 우홍장(于鴻章, 1917~1993)이 매입해 가업을 이어가면서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는데 결혼식장, 회갑잔치, 회식 등 지역의 격식있는 행사장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외국인에 대한 부동산 및 재산권 행사에 제한이 생기면서 많은 화상(華商)들이 경제적인 기반을 잃고 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자 화교(華僑)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고, 그들을 타겟으로 영업을 하던 청관거리의 고급 중국 요리집들은 눈물을 머금으며 폐업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인근에 자리했던 인천시청의 이전이 발표되자 선린동 일대의 화교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3대째 이어져 오던 공화춘도 1983년 우희광의 손자 우심진 대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한국에서 최초로 짜장면이라는 상표를 달고 짜장면을 판매한 곳으로 짜장면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다만 짜장면의 유래는 중국에서 춘장에 면을 비벼먹는 형태의 '작장면(炸醬麪)'(현대 한어 병음 표기로 'Zhajiangmian(자장몐)')이 1900년대 초반 선린동 일대 화교촌의 요릿집에서 자연스럽게 한국화된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하다. 즉 짜장면은 사실상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인천의 화교 1세대들은 공화춘이 짜장면의 원조라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형성된 요리를 짜장면이란 이름을 내걸고 판 곳은 공화춘을 최초로 보기에 짜장면 역사에서 공화춘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쫄면
쫀쫀한 면발에 새콤달콤한 양념이 어우러진 쫄면은 1970년대 인천에서 처음 '우연'하게 만들어졌다. 1970년대 초 인천의 국수 공장인 광신제면에서 냉면 면발을 잘못 뽑아 얇은면이 아닌 굵은 면이 나왔다. 실수로 나온 면을 인근 분식집인 맛나당이 구매해 고추장 양념을 넣어 비벼 먹은 것이 쫄면의 시작이다. 동네 분식집의 창의성에 힘입어 오늘날 분식의 대명사인 쫄면이 탄생한 것이다. 쫄면이 더 맛있고 독특한 면을 찾기 위한 기나긴 연구개발 끝에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설도 있다. 광신제면 인근의 맛나당과 명물당은 쫄면의 성지였다.
기원은 1970년대 인천 중구 경동의 광신제면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있다. 광신제면이 냉면 면을 뽑다가 사출구멍을 잘못 써서 굵은 면발이 나왔는데 버리긴 아까워서 인근 이웃 분식집에 공짜로 줬고 분식집 주인이 이걸 고추장 양념에 비빈 뒤 채소를 겉들여 만든 게 쫄면의 시초라는 주장이 흔히 쫄면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냉면과 쫄면은 원료가 다르고 색도 다르기에 이 주장은 믿기 어렵다. 냉면을 굵게 뽑는 것만으로는 쫄깃한 특유의 식감이 나지 않는다. 사출구멍을 잘못 썼다는 주장 역시 쫄면의 사출구멍에 맞는 다른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기 어렵다. 나아가 냉면 제면기를 통해 생산할 때 다른 사출구멍을 사용했더라도 이를 다시 제면기에 넣어서 정상 냉면으로 뽑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 실수로 굵게 면을 뽑더라도 이걸 분식집에 줄 정도로 많이 뽑기 전에 가동을 중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
당시 광신제면 운영주였던 장신자에 따르면 직원들끼리 식사용으로 먹던 국수가 탄력이 없어서 뚝뚝 끊어지자 '탄력 있는 면은 없을까?'하고 탄생한 것이 최초의 쫄면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실수로 나온 면이 아니라 일부러 쫄깃하게 만들려고 연구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는 주장. 하지만 이러한 주장 역시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 국수 면은 쫄면하고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원료 및 제조법에 의해서 생산되는데 국수를 먹다가 쫄면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점, 과거 '쫄면은 실수로 뽑은 면'이라는 이야기의 출처가 광신제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을 고려하면, '실수로 뽑은 면'이라고 주장하던 광신제면 측에서 앞에서 본 것과 같은 이유로 면 전문가들에게 '실수로 뽑은 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을 받자 뒤늦게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위 주장들은 광신제면 사장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보이고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개발 비화를 숨겨야 할만한 어떤 뒷사정이 있거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우후죽순 소문이 퍼지다 보니 뭐가 진짜 이야기인지 알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경우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일 뿐이며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인천 남구청 면류 제조업 1호로 허가받았던 삼성 식품 공업사 정돈시의 연구개발 결과물이라는 주장이 있고 이 주장이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받는다.
사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의 일본어 발음) 없이는 못 마십니다”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 선생이 1960년대 프로그램에서 유행시킨 속사포 랩 가사다. 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사이다는 인천으로 처음 유입되었다. 사이다가 국내 최초로 제조된 지역 또한 인천이었다. 1905년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로는 중구 신흥동에 ‘인천탄산수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을 세우고 국내 첫 사이다인 ‘별표 사이다’를 선보였다. 당시 경인철도 기차에 붙은 별표 사이다 광고에서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이다는 원래 유럽에서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가벼운 술로, 톡톡 쏘는 사이다와는 거리가 멀었다. 1850년대에 일본이 사과주(당시의 사이다) 향을 첨가한 탄산음료를 개발했고, 이것이 개항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국민 탄산음료인 사이다가 탄생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사이다'는 술과 관련 없는 탄산음료를 가리킨다. 대부분 색소를 첨가하지 않아 탄산수같이 무색투명하며 이중 한국에서는 사이다라 하면 칠성사이다처럼 레몬, 라임 맛이 나는 걸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사이다를 연상하면 라무네가 대표적인데 뽕따 같은 소다 맛을 사이다 맛으로 여긴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곳에서 '사이다'라고 하면 사과 발효주를 말한다.
19세기 말 강한 탄산과 낮은 도수의 사과 음료 같은 사과술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의미가 변해 사이다가 탄산이 있는 과일 맛 음료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재플리시 '사이다(サイダー)'가 한국으로 전해지며 콩글리시로 편입된 것이다. 레몬이나 라임 향이 들어간 물건은 '시트론(シトロン)'이라는 별개의 이름으로 불렀지만, 점차 발음이 쉬운 '사이다'로 싸잡혀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영어로 이러한 시트론 종류 음료를 가리키는 표현은 'Lemon-lime soft drink'이고, 일상적으로 이를 가리킬 때는 스프라이트, 7up 같은 상표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탄산음료를 '사이다'라고 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북한에서는 '경련애국사이다공장'에서 생산하는 '랭천사이다' 시리즈가 유명하다. 재일 교포 기부로 만들어지고 북한 경공업 공장 중 그나마 북한 정부 지원을 받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제품 질도 북한의 다른 탄산음료 제품에 비하면 양호하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사이다 같은 무색소 착향 탄산음료는 주로 '소다(soda)'라고 부른다. 탄산음료 전체를 (특히 공식적으로) 부를 때는 '소프트 드링크(Soft Drink)[4]'라고 부른다. 원래 탄산음료를 의미하는 표현은 carbonated beverage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소프트 드링크라고 많이 부른다. 탄산음료 문서로. 영국 등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레모네이드(lemonade)'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의 공식적인 용어보다 보편적으로 쓰며, 실제 거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말로 따르면 유럽에서 lemon-lime drink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 사이다를 찾으면 간혹 곤란한 음료를 받아 들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미국이나 유럽 각국에서 cider를 요청하면 알코올이 들어 있는(독한 것은 아니다. 맥주와 비슷한 수준....) 사과주를 받게 될 것이니 헷갈리지 말자. 만일 서양 식당에서 한국에서 마시던 사이다 비슷한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스프라이트나 7up을 주문하면 된다. 프랑스나 그리스, 튀르키예 등지에서는 gazoz(가조즈)라고 부르며, 추가로 프랑스에서 lemonade와 비슷하게 쓰는 limonade(리모나드)를 주문할 시 프랑스식 스프라이트 비슷한 음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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